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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격의 10·19 평양 탈환... 이승만이 평양에 나타나자 광장은 태극기 바다가 됐다 [호준석의 역사전쟁]
작성일 : 2026/09/23 10:46 / 조회 : 24 / 추천 : 0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통쾌한 북진이 계속되던 10월 5일. 충남도청에 차려진 미 1군단 사령부로 예하 사단장들이 소집됐습니다. 청주에서 싸우던 국군 1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L5 포병 연락기를 타고 충남도청으로 향했습니다. 평양 진격의 기회를 얻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꿈틀댔습니다. 평양은 그가 자라난 곳이기도 했습니다.


백선엽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미 1기병사단장(호버트 게이), 미 24사단장(존 처치), 영국 27여단장(바실 코드)이 작전계획서를 수령해 간 뒤였습니다. 백선엽은 200쪽 가까운 작전계획서를 서둘러 넘겨봤지만 1사단의 진격로는 해주와 안악 방면. 평양은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1사단이 평양으로 가지 못하면 국군 전체의 사기가 곤두박칠 것이 뻔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무슨 일이 있어도 평양에는 ‘우리 아이들’(마이 보이, 이 대통령은 국군을 그렇게 호칭)이 먼저 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백선엽은 프랭크 밀번 미 1군단장과의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감기가 심해 아무도 만나지 못한다며 참모장이 가로막았지만 백선엽은 문병이라도 하겠다며 강청했습니다. 아이젠하워와 밴플리트의 웨스트포인트(미국 육사) 1년 선배인 밀번은 겸손하고 소탈하면서도 용맹한 군인으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그는 다부동 전투 승리를 이끈 백선엽을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지휘 차량에서 페니실린 주사를 맞고 있던 밀번은 침대에서 일어나 백선엽에게 위스키 한 잔을 따라줬습니다. 33살의 사단장 백선엽이 어렵게 입을 열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이 전쟁은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입니다. 적의 수도를 치는데 왜 한국군을 빼놓은 것인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불과 50여 년 전 청나라가 점령한 평양성을 일본군이 함락시킬 때의 전법을 저는 깊이 연구했습니다. 제가 잘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평양에서 자랐습니다. 대동강의 어느 곳이 깊고 얕은지 모두 압니다. 대동강은 내가 동생과 함께 뒹굴면서 자란 곳입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백선엽의 말이 끊기고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말없이 듣고만 있던 밀번이 입을 열었습니다. “백 사단장, 평양에 정말 잘 갈 수 있겠나? 기동력이 미군에 비해 한참 떨어질 텐데 해낼 수 있겠나” “차량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장병들이 밤낮으로 걷고 또 걸으면 반드시 먼저 평양에 갈 수 있습니다.”

땅바닥을 보며 생각하던 밀번이 벌떡 일어나더니 전화기를 들었습니다. “참모장, 처치 장군의 24사단과 백 장군의 국군 1사단 전투구역을 맞바꿔라.”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보병,포병,정보,작전,인사,군수,통신이 모두 치밀하게 얽힌 세계 최강 미군의 작전계획서를 전쟁 중에 수정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군단장의 명을 받은 밴 브런트 참모장은 군말 없이 수정에 돌입했습니다. 끝나면 보내줄 테니 가서 기다리라고 했지만 백선엽은 3시간 동안 브런트의 옆에 앉아 버텼습니다. 그가 수정된 작전계획서를 들고 청주의 1사단 사령부로 들어서면서 “우리가 선봉으로 평양에 진격한다!”고 외치자 사령부는 함성으로 뒤덮였습니다.(이상 백선엽 회고록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중)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그때부터 1사단은 밤낮없이 진격했습니다. 험한 산길을 따라 최단거리로 행군했습니다. 발이 부르터 절뚝거리는 병사가 늘었지만 사단장이 뛰어다니며 “평양!”을 외치면 사병들도 목이 터져라 “평양!”을 외쳤습니다. “빨리,빨리”가 사단의 구호처럼 됐습니다. 미 공군의 폭격과 윌리엄 헤닉 제10고사포단장이 이끄는 포병의 지원사격 속에 적군은 맥없이 쫓겨갔습니다. 연승의 소식을 듣고 미 제6전차대대장 존 그로든 중령도 지휘본부를 이끌고 1사단에 합류했습니다. 50대의 전차를 확보한 1사단의 진군은 거침없었습니다. 국군은 밤에도 이동해 길을 트고, 동이 트면 미군 전차가 빠르게 쫓아와 합류했습니다. 하루 평균 25km의 놀라운 속도로 청주에서 평양까지 300km를 북진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마침내 10월 18일. 평양에서 20km 떨어진 지동리에서 인민군의 최후 저항이 펼쳐졌습니다. 여기만 뚫으면 평양까지는 광활한 벌판이었습니다. 저녁 6시쯤 시작된 전투는 맹렬했습니다. 미 공군과 포병의 지원 속에 밤새 벌어진 격전 끝에 마침내 1사단 12연대(연대장 김점곤)와 11연대(연대장 김동빈)가 차례로 적의 전면을 무너뜨렸습니다. 아침 안개가 걷혀오자 탁 트인 벌판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백선엽 사단장과 미군 전차 50여 대를 중심으로 양옆에는 2개 연대가 횡대로 늘어서고 100여 문의 포와 박격포가 뒤를 받치며 진격하는 모습은 장관이었습니다. 목표 지점은 평양 시내(본평양)로 건너가는 대동교 입구 선교리의 로터리였습니다. 작전계획상 여기서 미 1기병사단과 합류하게 돼 있었습니다.

마침내 10월 19일 오전 11시쯤 1사단이 목표 지점에 선착했습니다. 1사단에 파견돼 있던 미 1군단 연락장교 본 화이저 중위가 “사단장,드디어 평양에 왔습니다”라며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그는 미국 선교사의 아들로 평양 숭실중학교 옆에서 태어났습니다. 함께 행군해 온 미 전차부대 장병들은 ‘1기병사단 환영. 한국군 1사단 백(선엽)’이라는 영어 피켓을 만들어 걸었습니다. 백선엽이 만류했지만 이들은 “우리 팀이 이겼다. 우리는 자랑스럽다”며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15분 뒤, 게이 미 1기병사단장이 밀번 1군단장, 트루먼 대통령 특사 로우 소장과 함께 선교리에 도착했습니다. 밀번이 백선엽과 게이가 악수하도록 시키자 함께 도착한 내,외신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쉬가 터졌습니다. 평양 입성의 선두를 빼앗긴 게이 사단장은 내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다리 건너 평양 시내에서는 이미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외곽 모란봉을 통해 시내로 진입한 1사단 15연대(연대장 조재미)가 남아 있던 인민군 후방을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국군이 먼저 평양에 가라는 이 대통령의 특명을 받은 7사단(사단장 신상철) 8연대(연대장 김용주)도 평양에 진입해 김일성대학을 점령했습니다. 인민군은 패퇴했습니다. 오후 5시쯤 밀번 군단장은 백선엽 사단장에게 미국 정부가 주는 은성무공훈장을 수여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다음날인 10월 20일 아침, 국군 1사단 주력이 대동강을 건넜습니다. 백선엽은 곧바로 만수대 인민위원회의 김일성 집무실로 갔습니다. 스탈린 초상화와 김일성이 쓰던 책상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미 김일성은 사흘 전 평양에서 철수해 도주하고 있었습니다. 아군은 ‘국군이 왔으니 주민들은 마음 놓고 생업에 임하라’는 전단을 곳곳에 붙였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시내는 빠르게 질서가 잡혀갔습니다. 철도역이 공습에 부서졌을 뿐 평양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평양 형무소의 모습은 처참했습니다. 인민군이 쫓겨가면서 조만식 선생 등 반공,우익인사와 남한에서 끌고 온 인사 수백 명을 무차별 학살한 것입니다. 형무소 마당 뿐 아니라 평양 곳곳의 우물과 구덩이마다 시신으로 가득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보통강 건너 ‘붉은 거리’라는 곳에서 남에서 끌고 온 인사들에게 뒷산을 파게 하고 그 속에 쓸어 넣어 한나절에 걸쳐 기관총으로 계속 쏘아 사살했다는 목격자를 만났다. 낮은 야산 주변은 불과 만여 평으로, 흙덩이 위에는 아직도 생생한 피에 얼룩진 붉은 흙과 머리카락이 마치 잡초를 방불케 하여 보인다. 이 현장을 사진에 담았건만 남몰래 흘러내리는 눈물을 어찌할 바 몰랐다. 공산도당의 이 죄악상을 어떻게 보도해야 할까. 필설로 형용키 어려운 이 광경을 아직도 뇌리에서 지울 길이 없다.”(종군기자 김진섭 <기자 25시> 4.7언론인회, 1985)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김일성의 수도가 무너지자 전쟁은 끝난 것만 같았습니다. 대한민국은 물론 국제사회도 사실상 통일을 기정사실로 생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드디어 자랑스러운 우리 애들이 미군보다 앞서 평양에 입성했다고 신성모 국방장관과 정일권 참모총장이 보고해 왔다. 대통령이 ”됐어,됐어“하며 저토록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구쳤다.” (이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일기 <6.25와 이승만> 기파랑, 2010)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10월 25일 평양시청 앞에는 놀랄만한 숫자의 시민들이 운집했습니다.

“대통령 이승만 박사 入壤(평양 입성) 환영 시민대회는 25일 오전 11시부터 평양시청 앞 광장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시민들의 감격과 환호성 속에 시작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시민들은 거리거리에 아직 정리되지 않은 바리케이드를 뛰어넘으며 태극기를 손에 날리고 시청 앞 광장으로 물밀듯이 밀려들어 싸늘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10만 군중이 입추의 여지 없이 참집하였다. ‘대통령 이승만 박사 만세’, ‘오랫동안 그립던 우리의 이승만 박사 만세’라고 쓴 플래카드가 하늘 높이 날렸다.” (경향신문 1950.10.27)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그러나 이날 대통령은 오지 못했고 조병옥 내무장관이 대신 축사를 했습니다. 미국은 안전 문제와 공산 진영을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 등으로 이 대통령 평양행에 신중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열망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나흘 뒤인 10월 29일 오전 8시 35분, 미군 C-47 특별수송기에 탄 이 대통령이 여의도 비행장을 출발했습니다. 태극마크가 그려진 수송기는 55분 만에 38선을 넘어 평양 능라도 비행장에 도착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이 대통령은 시민들의 열광적 환호 속에 평양시청 발코니에 나서 인사했습니다. 이어 환영 시민대회가 개최됐습니다. 광장은 태극기의 바다가 됐고, 평양 시민들이 처음으로 대한민국 대통령과 함께 부르는 애국가 제창 소리는 온 천지를 울릴 듯 했습니다.(조선일보 1950.10.31.일자) 환호와 만세 소리가 그칠 줄 몰랐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감개무량한 어조로 17분간 연설했습니다.(동아일보 1950.10.31)

“나의 사랑하는 동포 여러분, 우리는 싸워서 피를 흘리고 자유 독립국을 세운 것이니 통일된 백성의 기상을 잊지 말고, 남이니 북이니 하는 파당심을 다 버리고 공산당을 발붙일 곳 없이 해서 우리의 자유를 침해치 못하도록 합시다. 동포 여러분 나와 같이 결심합시다. 공산당이 소련이건 중공이건 들어오려면 들어오너라, 우리는 죽기로 싸워서 물리칠 것을 세계에 선언합니다. 남과 북의 동포가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 뭉칩시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은 감동적이었다. 그를 보기 위해 모여든 평양시민은 어림잡아 10만 명은 돼 보였다. 시민들은 힘찬 환호로 대통령의 연설을 반겼다.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마치 통일이 이뤄진 것처럼 여기고 있었다.” (백선엽 회고록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중)

인구 50만에 이르던 평양은 빠르게 정상화됐습니다. 11월 5일 유일한 시장이던 창전리 자유시장이 문을 열었고, 10일부터는 화신백화점 앞에서부터 남북으로 뻗은 ‘메인 스트리트’ 양편의 상가들이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수도와 전력 공급이 재개되고 석탄값도 안정됐습니다. 서울에서 온 연극인들의 공연이 대성황을 이뤘고, 다방도 문을 열어 커피 한 잔에 서울과 같은 300원을 받았습니다. 11월 6일 중공군의 개입 소식이 전해졌지만 시민들의 표정에는 동요가 없었습니다.(이상 경향신문 1950.11.19~20)

평양은 5년간 김일성의 수도였지만 민심은 크게 기울어 있었습니다. 해방 후 북한의 표면적 산업 생산은 늘어났지만 모두 전쟁 준비를 위한 것이어서 민생은 피폐했습니다. 농지개혁으로 환호했던 농민들은 최대 60%에 이르는 현물세 징수로 공산당에 등을 돌렸습니다. 종교와 자유마저 억압되자 당시 북한 인구 열 명 중 한 명 이상이 전쟁 전 월남한 상태였습니다.(최소 추정치 70만, 최대 200만 명 이상)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산다’던 공산주의의 실상을 남한 주민들보다 더 빨리 알고 있던 것이 북한 주민들이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영원히 자유를 찾은 줄 알았던 평양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한 달여 만인 12월 5일 다시 공산 치하에 들어갔습니다. 수많은 평양 시민들이 필사적으로 남하를 시도했습니다. 평양과 진남포의 탈출 대열만 수십 만에 이르렀습니다.(1950.12.8 무초 미 대사)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12월 5일 적의 손에 떨어지기 직전의 최후의 평양은 폭음과 화염 그리고 그 충천하는 흑연 속에서 도강하여 남하하려는 시민들의 아우성으로 뒤덮여 있었다. 피난 권고는 12월 3일에 내려져서 대부분의 시민은 4일까지 피난을 하였으나, 4일 저녁 대동강의 가교가 최후 철수부대의 손으로 끊긴 다음에도 이 가교로 모여드는 남하 피난민의 수는 무수하였는바 그들은 파괴된 가교를 드럼통과 부서진 가교의 목편 등으로 얽어매가지고 건너는 것이었다.” (조선일보 1950.12.13)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다시 김일성의 손아귀에 들어간 평양은 그로부터 76년째 3대 세습정권의 수도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평양시청 앞에서 자유와 정의를 외쳤던 이승만의 꿈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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